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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땡볕 아래 텅 빈 거리에서

요즈음처럼 무척 더운 여름날이었다. 내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친구가 볼보 차를 운전해서 나를 이태원 초입 삼거리 콜트 동상이 있던 언저리에 내려놨다. 늘 저녁까지 함께 놀던 그가 대낮에 왜 나와 헤어지자고 했는지? 나는 아쉬움에 손을 흔들며 그와 눈 맞춤을 하려고 했다. 그는 내 시선을 무시한 채 싸늘한 표정으로 유턴해서 사라졌다.     학창 시절 그는 5번 나는 6번, 우리는 단짝이었다. 늘 붙어 다녔다. 배가 고프면 중국집으로 달려가 친구가 짜장면 하면 나는 짬뽕을 번갈아 가며 시켜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도 그가 사는 동작동에서 짬뽕과 짜장면을 나눠 먹고 헤어진 것이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그의 싸늘한 모습이 너무도 섬뜩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살면서 또 다른 두 만남도 태양 빛이 쏟아지던 대낮이었다. 지글거리는 태양을 쳐다보던 그가 “그만 집에 가자.”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와 헤어져 뜨거운 내리막길을 쓰러질 듯 천천히 내려갔다.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만남도 땡볕이 내리쬐는 3시경이었다. 나는 돌아서 가는 그를 서너 번 뒤돌아봤다. 그도 두 번 뒤돌아 나를 봤다. 내가 마지막 돌아봤을 때 그는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또 ‘마지막 만남’이라는 슬픔에 가슴이 아렸다. 세 사람 모두 다시는 만난 적이 없다. 땡볕 아래에서의 가슴앓이가 너무 생생해서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서인가 보다.     그래서일까 지글거리는 땡볕 아래에 서면 누군가와 헤어짐이 시작되고 있는 듯 내 뼈를 두드리는 아픔이 들려온다. 슬픔이 서서히 온몸을 파고든다. 그럴 때 나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선탠을 한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내가 아닌 타인종이 되어 그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헤어짐을 잊고 싶어서인가 보다. 지난 4월에 적도에서 한 선탠 이후로 올여름에는 하지 않았다. 어린애들이 때가 되면 하던 짓을 멈추듯 선탠 중독도 멈췄다. 자연스럽게 나를 덮칠 때까지는 계속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올여름부터 더는 하고 싶지 않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헤어진 친구들도 안개 속으로 사라진 듯 잊히고 선탠도 멈추고, 시간이 해결해 줬다     카뮈의 이방인 소설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이유가 ‘뜨거운 태양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관계에 잘 적응하기 위해 꾸미고 거짓을 하다가 땡볕 아래에서는 마음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분노를 더는 감출 수 없어서 분출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뜨거운 여름날에는 사람 만나기가 두렵다. 만남의 기쁨도 잠시 이유 없는 화가 솟구쳐 마음속을 송두리째 상대에게 쏟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리우면 차라리 동네 바에 앉아 바 안의 손님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것이 낫다. 기네스 맥주를 시켰다. 쭉 들이켰다. 쓰다. 후련하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땡볕 거리 땡볕 아래 선탠 중독도 태양 아래

2023-08-11

[시조가 있는 아침] 땀은 듣는대로 듣고 -위백규(1727∼1798)

땀은 듣는대로 듣고 볕은 쬘대로 쬔다   청풍의 옷깃 열고 긴 파람 흘리 불 제   어디서 길가는 손님이 아는 듯이 머무는고   -삼족당가첩(三足堂歌帖)   바른 말 바른 글은 쉽지 않다(고딕으로 처리)   무더운 여름도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땀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볕은 쬘 대로 쬔다. 맑은 바람에 옷깃을 열고 휘파람을 길게 흘려 불 때, 어디서 길가는 손님이 아는 듯이 멈추는구나.   이 시조는 땡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건강한 노동을 그리고 있다.   위백규(魏伯珪)는 시골에서 일생을 보냈다. 1765년 생원복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자영농업적인 생활로 들어갔다. 사회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향촌 사회의 자율성을 모색했다. 따라서 이 시조는 그의 일상 모습을 그린 생생한 생활시다.   1796년, 그의 저술을 본 정조의 요청에 의해 백성의 실상과 그 해결책을 논한 ‘만언봉사’를 올렸다. 정조는 그를 옥과현감에 임명했는데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승지 윤숙 등은 이 글이 사투리를 마구 써서 임금의 귀를 더럽혔다고 성토했고, 고과에서 최하등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중앙에 자리가 나는 대로 올리도록 하라”고 명했다. 왕의 이런 배려에도 중풍이 악화돼 정조 22년 세상을 떠났다. 예나 지금이나 바른 말을 하고 바른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향촌 사회 사회 현실 땡볕 아래

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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